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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고산은 마포구 대흥동과 염리동 사이에 위치한 산입니다. 해발 106m밖에 되지 않는 작은 산이지만 조선시대 한양 도성 내에서는 보기 드물게 넓은 평야 지대인 서강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라 예로부터 전략적 요충지로 여겨져 왔습니다. 또한 이곳은 고려 말 공민왕 때 중국 원나라 사신이었던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왕사였던 보우 스님이 이 성 안에 피난 와 있던 백성들을 이끌고 싸워 물리친 역사적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노고산 정상에는 ‘무학대사비’라고 불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고, 주변에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사찰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노고산이라는 이름은 어떻게 지어졌나요?
노고산이라는 이름은 옛날 한 노파가 아들 삼형제를 데리고 이곳에 정착하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집니다. 당시 사람들은 할머니가 아이들을 업고 다니는 모습처럼 보인다고 해서 한자로 늙은 할미(老姑)라는 뜻의 ‘노고산(老姑山)’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노고산 인근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그런 전설 같은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대답합니다. 다만 일제강점기 이후 일본식 지명 정비 사업 과정에서 원래 마을 이름이던 ‘미륵당고개’ 대신 비슷한 발음의 한자어인 ‘노고산(老姑山)’으로 바뀌었다는 게 정설입니다.
조선시대 군사적 요충지였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고려 말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1396년(태조 5) 태조 이성계는 강 건너편의 행주산성 등과 함께 이곳에 목책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1413년(태종 13)에는 한강변 방어를 강화하기 위해 흙으로 쌓은 토성을 돌로 다시 쌓았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 명나라 군대가 주둔하며 군량미 창고를 지었고, 1624년(인조 2)에는 인조반정군이 청나라 군대와의 전투를 준비하던 훈련장으로 쓰였습니다. 그러다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이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병인박해 사건 후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 부근까지 침범하자 고종은 그해 8월 10일 새벽 6시쯤 급히 궁궐을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습니다. 이때 대원군은 공덕리에 머물던 부대를 불러들여 진을 치고 9시간 동안 치열한 전투를 벌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양화진 전투’입니다.
지금 남아있는 유적으로는 뭐가 있나요?
현재 노고산 자락에는 옛 절터 두 곳이 남아있습니다. 먼저 흥국사 터는 신라 문무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유서 깊은 사찰이었으나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유실돼 현재는 주춧돌 몇 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반면 봉원사 터는 규모가 훨씬 크고 보존 상태도 양호한데, 특히 대웅전 앞뜰에 서 있는 괘불석주가 눈길을 끕니다. 높이 7m가량의 거대한 화강암 기둥 위에 연꽃무늬 장식물을 얹은 형태로, 국내 유일의 석주형 괘불석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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