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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위치한 영축산은 조선시대 때 왕릉인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과 관련되어 이름 붙여졌습니다. 이 산 아래엔 광운대역이 있고, 주변으로는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있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입니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광운대역 근처에 사는 주민으로서 학교나 회사 갈때마다 보는 이곳(영축산)이름 유래가 궁금해요!
조선왕조실록 태조편 기록에 따르면 1396년 10월 5일 “신덕왕후 정릉 안에 있던 석물들을 모두 헐어버리고 태석만을 남겨두었다”고 적혀있습니다. 이후 1409년 9월 7일 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친어머니이자 고려 말 충신이었던 신의왕후 한씨의 무덤인 제릉 옆에 신덕왕후의 묘를 조성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2월 25일 제사를 지내도록 명했습니다. 이때 만든 정자각이 현재 남아있는 ‘정릉’이며, 원래 있었던 자리였던 흥천사 자리는 지금의 우이천 변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럼 왜 하필이면 태릉 옆에 묻히게 된건가요?
태종 이방원은 당시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고, 왕위에 오른 후 형제들을 죽이고 세자 방석을 폐위시키는 등 피의 숙청을 진행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개국공신 중 한명이었던 하륜에게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또한 세종대왕에게는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을 경계하도록 조언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속에서 둘째 형인 방간 역시 동생 방원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두 형제는 무력충돌을 하게 되었고, 결과는 참패였습니다. 이로 인해 방간은 귀양을 가게 되고, 방원은 왕좌에 오르게 됩니다. 이렇게 하여 첫째 형인 방과가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고, 정종이 죽은 후 문종이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문종은 재위 2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단종 복위운동 실패로 사육신이 처형당하고, 세조가 등극하면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영축산'이라는 이름은 언제 생긴건가요?
본래 지명은 숭산이었는데, 15세기 중반쯤 부터 영축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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