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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노성산은 고려시대때 부터 군사훈련장으로 이용되었던 역사 깊은 산입니다. 이 곳에서는 매년 가을마다 의병들이 모여 훈련을 하고 전투를 벌였다고 합니다.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등산과 산책을 하러 오는 명소이기도 한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러한 유서깊은 장소인 이천 노성산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고려시대 때 왜 이곳에서 군사훈련을 했을까요?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국가인 고구려는 중국과의 전쟁 중 자주 패배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군대 양성이 필요했는데요. 고구려 장수왕은 백제와의 동맹을 깨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면서 신라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신라는 계속해서 고구려군을 막아냈고, 결국 국력이 약해진 고구려는 멸망하게 되죠. 이후 통일신라 시대에서도 국방 강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잦은 외침 속에서 백성들을 지키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특히나 후삼국 시기에는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호족 세력이었던 견훤 또한 힘을 키워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상황속에서 나라를 지키려면 강한 군대가 필요했고, 당시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이천지역의 노성산에서 군사훈련을 하게 된 것이죠.

왜 하필이면 지금의 이천이었을까요?
고구려 시절부터 이어져온 전략적 요충지였던 이천은 삼국통일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했는데요. 당나라 소정방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이 금강 하구 기벌포(지금의 서천)에서 상륙작전을 펼쳤지만 실패했습니다. 그러자 나당 연합군은 육로를 통해 공격하고자 했고, 소부리주(현재의 부여) 주둔 병력 1만 명을 이끌고 남하하던 김유신 장군은 탄현(대전 부근)을 넘어오는 적을 맞아 매복 작전을 펼쳐 승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7월 18일 드디어 황산벌(논산)에서 계백장군이 이끄는 5천 결사대와 맞서 싸웠는데요. 4번의 싸움 끝에 패전한 김춘추는 자신의 아들 문무왕에게 권력을 물려주고 퇴각하였고, 마침내 9월 11일 사비성(부여) 함락되면서 660년 백제는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요?
조선시대 임진왜란 직전까지는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규모의 군사훈련이 이루어졌는데요. 주로 관군 중심이었지만 일부 지방관아에서는 민초들에게도 군역을 부과하며 예비군 성격의 향병을 조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592년 일본이 쳐들어오면서 한양 도성이 함락되고 선조는 의주로 피난을 가게 되는데요. 그러면서 모든 군사훈련이 중단되었습니다. 다행히 이순신 장군 등 뛰어난 지휘관 덕분에 일본군을 물리칠 수 있었지만 국가 재정 악화 및 민심 불안 문제가 발생하자 1604년 광해군은 다시 군사훈련을 실시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인조반정으로 인해 잠시 중단되었다가 1728년 이인좌의 난 진압과정에서 본격적으로 부활하였는데요. 영조 재위 기간 동안 꾸준히 시행되다가 정조 즉위 직후부터는 더욱 체계화되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의 근대식 군사훈련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천 노성산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오랜 시간동안 여러가지 사건사고를 겪으며 발전해온 대한민국처럼 이천 노성산 역시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네요. 앞으로도 좋은 정보 많이 전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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