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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리산(水里山)은 조선시대 때 사람들이 산 속 깊은 곳에 절을 짓고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인 1467년(세조 13년) 세조가 왕위찬탈 후 단종 복위운동을 꾀하던 사육신과 박팽년 등에게 사약을 내리고 이들을 처형하였다. 이때 이곳 주민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데, 당시 살아남은 승려들이 인근 설악산 진전사(陳田寺)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돌아와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후 18세기 후반 무렵까지는 폐사되어 있던 사찰이었는데, 1922년경 김씨 성을 가진 한 스님이 현재의 자리에 암자를 지어 살게 되면서 비로소 불교사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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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수리산이라는 지명은 어떻게 유래되었나요?
양양수리산이란 명칭은 신라 말엽 도선국사가 창건한 낙산사라는 큰절이 있었던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일제강점기 이전의 기록이며, 오늘날 전해지는 문헌자료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여지도서』나 『조선지지자료』등 일부 자료에서만 ‘낙산’ 또는 ‘낙산사’라고 표기되었을 뿐이다. 따라서 원래 낙산도량이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한편으로는 고려말 왜구의 침입 시 피신한 승병들이 머물렀던 곳이라 하여 ‘피내골’ 혹은 ‘피내절터’라고도 하였다. 그리고 다른 설로는 옛날 동해안 일대에 자주 출몰하였던 왜구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기 위해 부처님께 기도드렸던 장소라 하여 ‘부처님동네’ 즉 ‘불동’이었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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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수리산엔 어떤 문화재가 있나요?
양양수리산 내에는 불교문화재로서 보물 제499호인 삼층석탑 1기와 지방유형문화재 제76호인 부도 2기가 있으며, 유적으로서 사적 제398호로 지정된 보광전 및 부속건물지 5동이 있다. 또한 유물로서는 통일신라시대 석조물인 연화대석 4점과 석탑부재 8점이 남아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민묘유구·고분·산성유적 등이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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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수리산 주변 관광지는 어디가 있나요?
양양수리산 서쪽 기슭에는 천년고찰 낙산사가 위치한다.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진신을 친견하러 가던 길에 붉은 연꽃 위의 관음보살을 직접 보고 세운 절로, 671년(문무왕 11)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다. 2005년 산불로 대부분의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홍련암만은 화마를 면했다고 전해진다. 경내에는 원통보전과 칠층석탑, 건칠관음보살좌상, 해수관음상, 홍예문, 요사채 등이 있고, 바닷가 절벽 위에는 높이 16m의 해수관음상이 서 있다. 동쪽 해안에는 하조대해수욕장이 조성되어 있다. 해수욕장 앞바다는 수심이 얕고 경사가 완만하며 울창한 송림이 우거져 가족단위 피서지로 적합하다. 북쪽 끝 죽도정 전망대에서는 아름다운 일출을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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